주기능은 '재능'이 아니다
주기능은 ‘재능’이 아니다
MBTI 아고라(?)에서 흔히 쉽게 쉽게 말하는 내용 중에 “기능은 슈퍼파워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주기능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다. 최소한 전통적 의미에서의 '재능'과는 크게 다르다. MBTI에서 말하는 주기능은 그 기능 없이는 버티지 못했던 심리적 압력 속에서 강화된 대응 메커니즘이다. 특정 기능이 뛰어나서 선택한 게 아니라는 말. 성격 발달 과정에서 “흠, 이게 내 메인이 되면 좋겠군” 같은 자발적 선택 따위는 없었으니까.
주기능 위에 체중이 실린 채 고착되게 된 이유는 단 하나 — 그쪽 역량 없이는 (사회적, 인격적)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주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적응하지 않고서는 환경의 압력 하에서 나의 심리적 생태계가 폭삭 쪼그라들 각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한번 더 바꿔 말하면, 그 기능은 처음부터 완성형으로 만들어져서 갖고 태어난 탤런트라기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마주친 수많은 응급 상황들 속에서 마음의 붕괴를 막기 위해 급하게 만든 가건물이 세월에 걸쳐 진화하게 된 구조물’이 아닐까?
예컨대 Se가 주기능인 ESTP는 ‘관찰력을 뛰어나게 하는 유전 형질’ 같은 걸 갖고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다. 오히려 ‘체계적인 내적 구조’가 없었기 때문에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내뿜는 각종 자극을 초인적 집중력으로 실시간 읽어내지 못하면 생존이 위협될 만한 상황이었고, 그 때문에 감각 데이터에 고도로 락온(lock-on)한 결과인 것.
Ni가 주기능인 INFJ 역시 태생적으로 지혜로운 아가였던 게 아니다. 즉각적인 현실이 너무나도 무작위적이고 분열적 서사를 가졌기 때문에 그 혼돈을 견디기 위해 방대한 의미의 패턴을 만들어야만 했던 것.
주기능은 왕관이 아니라 흉터조직
그렇게 본다면 MBTI의 ‘주기능’은 승리의 트로피 같은 게 아니라 인생의 초창기부터 마음이 겪어온 취약함을 감싸며 형성되온 일종의 심리적 흉터조직. MBTI가 말해주는 건 인생이라는 배틀필드에서 내가 내 방어진지를 구축한 자리를 말해준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내 내적 생태계 안에서의 ‘상대적 자리’만을 말해주는 지표.
재능이나 능력을 검출하는 도구가 아니므로 타인과의 역량 비교 점수가 아닌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엔 T보다 지능이 높은 F가 그리도 많은 거고, S만큼이나 현실에 빠꼼인 N이 충분히 많이 존재하는 것.
요약: 주기능은 ‘재능’이 아니라, 이 현실 세계에서 맞닥뜨린 존재론적 위기 앞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응급 가건물. 이후 임시변통 방어 진지 위로 벽돌을 쌓아올려 거대한 요새가 되어버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