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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팁ISTP의 모든 것④ 극도로 예민해진 감정

ISTP는 감정이 없는 게 아니다. 다만 잘 절연되어 있을 뿐이다.

T중의 T, 쌉T 잇팁(ISTP)의 특징을 알아보자 ④

잇팁(ISTP)의 방황 - 극도로 예민해진 감정

(아래 내용은 ISTP를 염두하고 썼지만 INTP에도 거의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만성적 스트레스에 신경이 얇아진 ISTP유형은 감정 및 관계적 요소에 평상시보다 훨~씬 민감해집니다. 평상시의 ISTP는 초연하죠. 감정의 똥밭을 구르는 일이 없습니다.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한마리 독수리처럼 자유롭게 사는 걸 선호합니다. 감정의 축축한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원체 감정과 절연한 생활을 하다보니 때론 자기가 감정에 대한 항체가 있다고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자기는 감정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고, 혹은 뭇 사람들의 감정이 폭발하는 험악한 봉산탈춤의 현장에서 나만은 장시간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실제로 일상의 감정으로부터 단열이 잘 돼 있어서 착각할 근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크하고 쿨하기 이를데 없는 ISTP 유형이지만, 스트레스에의 지속 노출로 방어막이 약해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잇단 트리거에 멘탈이 임계를 넘게 되고 결국 고고하게 머무르던 높은 봉우리에서 추락하게 됩니다. 불시착한 그곳은 인간이란 종족이 살고 있는 감정의 라라랜드.

ISTP 유형의 기능 위계 (Ti-Se-Ni-Fe)

높은 곳에서 사람들과 거리를 둔 채 고독하게 지낼 때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건(좋아하건 말건) 신경쓰이지 않습니다. 그게 애당초 ISTP의 관심사도 아니고 사람들과의 심적 거리도 꽤 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높은 곳에서 내려와 개똥밭을 구르게 되면서부터는 그토록 멀기만 했던 타인의 감정 데이터가 무척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타인의 판단' 하나하나로부터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타격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죠. 평소 단열이 잘 돼 있었던 만큼 역설적으로 감정에 대한 면역이 부족합니다. 관계적/감정적 사실들이 유독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감정 자체의 불편함에 더해 내가 거기에 휘둘리고 있다는 인식이 불쾌감을 키웁니다.

평소 남의 비판을 ‘머리 차원’에서 처리해 받아치던(혹은 무시하던) 사람이 갑자기 누가 봐도 별것 아닌 코멘트에 깊숙한 내상을 입고 쓰러집니다. 평범한 코멘트를 악의에 찬 사적 음해 공작으로 과잉 해석합니다. 남들이(가족, 동료) 나를 무시하고 방치하는 (존재하지 않는) 패턴을 체계적으로 읽어내는 등 편집증이 심해집니다.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화를 터뜨리는 패턴이 흔합니다. 감정 언어를 충분히 훈련해 오지 않았으므로, 소통가능한 형태로 감정을 조곤조곤 서술하는 일이 참 어려운 잇팁입니다. 감정을 서술하기보다는 그런 부정적 기분을 낳은 기초적 팩트와 상황(원인)만을 반복 진술하거나, 아예 분노에 잠식되어 원초적 감정(결과)만을 표출할 뿐, 그 사이 어딘가 위치한 자신의 감정 그 자체에 대한 차분한 전달은 어려워 하는 것이죠. 통찰도 부족하고요.

AI에게 위탁해서 만든 삽화: 잇팁의 내적 고통(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의 최저점에서의 ISTP의 모습은?

일단 자기 연민 굉장히 심해집니다.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나를 (일부러) 엿먹이려고 했다고, 내게 모멸감을 안겨줬다고, 나의 희생을 당연시한다고....(이런 워딩 실제로 씁니다) 깊은 상처와 불만을 곱씹으며 증오/분노에 빠르게 소모돼 갑니다.

​내향적 사고형은 감정의 언어에 숙달되지 않은 경우가 많고, 대인 관계 스트레스에 직접 대응할 정규적 수단이 별로 없습니다. 손쓸 수도 없이 부정적 감정이 커지다가 급기야는 예고 없이 폭발해 버립니다. 참고 또 참으며 꾹꾹 담아두던 끝에 터지는 거라, 그 갑작스러움과 폭발력에 상대방은 놀랄 수 밖에 없고요.

평소 ISTP랑 가깝게 지내며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지인이라도, 이런 식의 감정적 분출을 예상하긴 정말 어렵습니다. 왜냐고? 전혀 티가 안나기 때문입니다. 티를 낼 줄도 모르고요 (티를 내는 일도 많이 해본 사람이 잘 하는 법). 잇팁의 분노는 멀리서부터 미리미리 알아채기가 어렵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50미터 앞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상승해 예측가능한 속도로 다가오는 식이 아닙니다. 침묵과 무반응으로 40미터를 잠행한 후 폭발 10미터 앞에서 처음으로 감정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 이때까지도 하는 말이 나름 논리정연한 편이기 때문에 상대로서는 통상의 합리적 불만이려니 여깁니다. 그러던 중 급작스럽게 -전혀 의외의 순간에- 잇팁의 눈물보가 터져 버리는 것이죠. 터지는 게 분노나 눈물이면 그래도 괜찮은데, 자기 파괴적 행위나 기물파손, 사회적/업무적 테러 행위 등일 경우 정말... 누가 구해줄 수도 없습니다. 쉽게 말해 사고를 쳐버리는 거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잇팁은 혼자고요. 남들이 버려둬서 혼자가 아니라, 남들이 알아채고 개입할 수 있도록 적시에 시그널을 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혼자인 안타까운 상황.

이런 식의 전개를 겪으며 큰 상처와 손해를 입은 후에서야 ISTP는 자기가 얼마나 무방비했던가를 비로소 배우게 됩니다. 아, 나는 감정에 초연했던 게 아니구나. 나는 체질적으로 감정에 면역이 있는 게 아니었구나…

​잘 모르는 사람은 ISTP유형이 감정의 무균실에서 언제까지고 쾌적하게 살아갈 것으로 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삶의 97%를 감정에 둔감한 채 살아가지만 나머지 3%에 해당하는 짧은 시간엔 극도로 감정에 예민한 국면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 짧은 국면이 나머지 삶을 흔드는 힘은 굉장히 크죠. 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들어대며 쥐락펴락 하게 됩니다.

‘잇팁의 모든 것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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